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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옷소매 붉은 끝동 ~ 정조 대왕의 인생 이야기

by 물결 941213 2021.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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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소매 붉은 끝동에는 정조 대왕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정조 대왕을 모티브로 해서 나온 드라마는 MBC 드라마 '이산' 이후 14년 만입니다. 이번에 나온 옷소매 붉은 끝동은 파죽지세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실제 정조 대왕의 인생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과 정조)

 

실록에 나온 정조 대왕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아야 드라마 스토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조의 어린시절과 그가 왕이 된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안다면 드라마가 더 박진감 넘칠 것입니다.

 

 

 

1. 힘들었던 정조대왕의 어린 시절 

 

정조대왕은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반적인 아이였다면 끔찍한 트라우마에 빠져 삐뚤어졌을텐데 정조대왕은 모범생으로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만큼 내적인 고통은 심했을 것입니다. 

 

왜 힘들었을까요?

 

정조대왕의 아버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도세자'입니다. 뒤주에 갇혀서 굶어 죽은 비운의 세자인데, 정조대왕은 할아버지였던 영조가 자기 아버지를 굶겨 죽이는 것을 어린 시절 목격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좁은 상자에 가둬서 굶어 죽였는데, 정작 본인도 그 할아버지 눈 밖에 나면 죽는다고 생각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얼마나 긴장하면서 살았을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정조 대왕은 늘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항상 학문에 열중했고, 영조에게 극진한 효심을 보였습니다. 사실 영조도 왕위를 이을 자손이 정조였기 때문에 정조가 즉위할 때까지 힘을 실어 줍니다.  

 

여기서 힘을 실어 주었다는 것은, 정조가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영조는 정도를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을 시킵니다. 효장세자는 영조의 첫째 아들이고, 사도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정조는 큰아버지의 아들로 신분세탁을 하게 됩니다. 영조는 왜 그런 일을 벌였을까요? 

 

그것은 사도세자가 왕을 능멸한 죄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자식은 결코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조는 정조를 큰아버지의 아들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래저래 상황을 맞춰보아도, 정조는 품성이 강하고, 참을성이 강한 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나중에 대왕의 호칭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임금이 되었지만, 어린 시절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2. 애민군주였던 정조 대왕

 

우리나라 조선역사에서 대왕의 호칭을 받은 임금은 세종대왕과 정조대왕 둘 뿐입니다. 그만큼 정조대왕은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임금이었습니다. 

 

정조대왕은 조선 후기의 임금인데, 조선 후기는 당파싸움이 심했던 시기였습니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해서 당파 구분 없이 학문을 통해 관리를 키우려고 애썼습니다. 정조 본인이 엄청난 학구파였거든요. 

 

정조가 꿈꾸었던 이상향은 바로 조선초 사대부들이 중심이 되었던 정치체계였습니다. 본인이 임금이 되고 보니 서로 파벌을 만들어 싸우고 있었으니, 가장 이상적인 국가 모습을 조선 초기에서 찾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노론의 시파와 벽파가 있었는데, 시파는 정조의 정책에 동조하는 그룹이었고, 벽파는 정조의 정책에 반대하는 그룹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홍국영이 등장하는데, 홍국영은 노론 벽파를 내몰고 정조의 왕권을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정조대왕은 천주교와 서학에 대해서 온건하게 대처했는데, 본인이 유학에 있어서 대성했던 학자였고, 이미 조선에는 불교, 도교 등 외부 문물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조 시대에는 천주교가 그런대로 크게 이슈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유명한 수원화성은 정조가 거중기를 이용해서 매우 빠르게 쌓은 산성입니다. 일설에 따르면 수원화성은 정조가 나중에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 본인이 머물 장소로 지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용영이란 궁궐 수비대를 만들어 강력하게 양성했는데, 이 또한 본인이 화성에 머물 때 활용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설이 있죠. 

 

정조는 역대 왕들 중에서 문무를 겸비한 임금이었으며, 올바른 통치철학을 가진 군주였습니다. 조선 후기의 임금 중에서 정조시대까지 조선이 역동적으로 움직였고, 그 이후 임금부터 조선은 쇠락의 길을 걷습니다. 

 

 

3. 역사적으로 정조시대가 중요했던 이유 

 

정조대왕은 무려 25년간 조선을 통치합니다. 

 

이 시기가 조선역사 중에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세계사 측면에서 비교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임금이었던 시기는 1776년~1800년입니다. 

 

이 기간은 서양의 산업혁명 시기와 일치합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미국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해 거대한 국가를 이룹니다. 중국도 건륭제가 60년간 통치를 하면서 수많은 서양 상인과 선교사들로 글로벌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정도 대왕도 다른 조선의 임금에 비하면 놀랄 정도로 혁신적이고 뛰어난 정치를 했지만, 국제적으로 좀 더 문물을 받아들였다면, 이후에 좀 더 산업화를 앞당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총 25년간 통치를 하면서 말년 5년 정도는 병마와 싸우면서 보냈습니다. 

 

정조는 종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데, 고름이 맺혀 종기가 나면, 외과에 가서 째고 소독약을 바르면 낫겠지만, 당시에 종기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임금의 몸에 칼끝 하나 댈 수 없었으니 환자인 임금은 종기의 고름을 스스로 이겨내야 했으니까요. 

 

실록에 보면 하루 종일 피고름을 짜냈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는데, 종기로 열도 나고 쑤셔서 제대로 정사를 돌보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정조대왕이 여러 가지 제도를 많이 개선시켰는데, 결정적으로 '환곡 제도'를 정비하지 못했습니다. 정조대왕 이후에 가면 이 환곡 제도를 이용해 온갖 탐관오리들이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습니다. 

 

환곡은 빈궁기에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나중에 갚을 수 있는 복지제도였는데, 나쁜 관리들이 썩은 품질의 곡식을 빌려주고, 나중에 양곡을 수취해 이득을 챙기고, 빌리지 않겠다는 백성들에게 강제로 고리의 이자를 받아가며 곡식을 빌려주기도 하는 등 환곡을 이용한 악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정조는 조선시대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예전에 드라마 '이산'으로 그려졌고, 지금은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정조대왕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좀 더 그의 역사적인 업적과 아쉬움을 우리가 엿볼 수 있도록 드라마가 기획되면 좋겠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조선역사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읽고 있습니다. 3~4년 전에 사 두었는데, 필요할 때마다 찾아서 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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