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순신 장군 하면 떠오르는 3대 해전에 대해 정리를 해 놓으려고 합니다. 앞으로 계속 영화로 만들어질 텐데 어떤 전투였는지 개요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영화를 더 재미있게 즐기기 위해서 말입니다. 역사적인 배경을 보고 영화를 감상하도록 합시다.
1. 명량대첩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승리를 거둔 것은 불가사의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이순신 장군 본인도, 하늘이 도왔다고 할 정도로 위험한 전투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함선은 13척이었습니다. 대부분 12척으로 기억을 하는데, 실록의 기록에는 13척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중간에 1척의 수리가 끝났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반면, 왜군은 책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333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단 규모 자체가 게임이 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이순신이 문과급제를 위해 공부하던 선비였고, 무과 급제 후에는 수군이 아니라 육군에서 근무했던 이력이 있었던 반면 상대였던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일본의 시마섬에서 태어난 순수한 섬사람으로 조류가 센 구루시마 해협에서 헤엄치고 자랐던 뼛속까지 수군 출신인 사람이었습니다.
전투가 벌어진 명량해협은 지금의 진도대교 쯤되는데, 해협의 굉장히 좁고,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해서 물살이 매우 센 곳입니다. 조류발전소 시험을 하는 곳이니 말 다했죠.
이순신 장군은 불과 13척의 전함으로 이 좁은 길목을 일자 형태로 지키고 있었고, 300여 척의 왜군은 이 해협으로 빨려 들어오면서 200척, 70척 순서로 좁은 해협으로 돌진했던 것입니다. 조선 수군이 봤을 때는 아마 왜군 전함이 먼바다에 새까맣게 몰려오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때 이순신은 멋진 말을 합니다. "죽자고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능히 천명도 두렵게 한다고 했다." 하지만, 전투에선 모두 겁을 먹어서 이순신 장군 홀로 전투에 임하게 됩니다.
이순신의 분전에 다른 배들도 전투에 참전을 해서 난전이 되는데, 이 상태로는 이순신의 참패가 불 보듯 했지만, 하늘이 돕기 시작합니다. 때마침 썰물이 되면서 왜선들이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고, 뒤따라 들어오던 왜선이 부딪혀 엉키면서 서로 아수라장이 된 것입니다.
이때 적장 구루시마의 시체가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것을 이순신 장군이 건져 올려 목을 베어 배 위에 걸었다고 합니다. 먼바다에서 지켜보던 왜군들은 놀랐겠죠.. 들어가면 서로 부딪혀 망가지고, 이미 장군은 죽었고, 전의를 상실했던 것이죠.
2. 한산대첩
한산도는 당시 전쟁에서 공격과 수비 관점에서 제해권 장악을 위해 중요한 지점이었습니다. 육지에서는 승전을 하는데, 해전에서 계속 패해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수군을 강화합니다. 1진 와키사카 아스하루 70척, 2진 구키 요시타가 40척, 3진 카토 요시아키도 다수의 군함을 가지고 참여합니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원균의 함선 7척을 만나 당포에 왔다가 견내량에 일본군 70여 척이 모여있다는 정보를 입수합니다. 이에 그들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는 전술을 세웁니다. 종종 일본군이 전세가 불리해지면 육지로 도망갔기 때문에 이들을 전멸시키기 위해 바다 한가운데에서 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특히, 견내량은 해전을 벌이기에 너무 좁고 물살이 세서 이순신에게 불리했습니다. 계획대로 5~6척의 판옥선으로 적군을 유인했는데, 일본 수군이 따라 나와 학익진으로 둘러싸 일시에 적군을 섬멸한 전투입니다. 이때 불태워 버린 적함이 66척이라고 합니다. 70여 척에서 거의 95%를 한 번에 없애버린 것이죠.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 보면,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는 장면에서 피가 마릅니다. 왜장 입장에서도 굳이 유인하는 데 따라나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장군함까지 동원해서 함께 유인작전에 참여해 적을 유인합니다.
당시 일본의 전술은 빠른 접근 후 월선을 해서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순신 함정이 가까이 다가왔는데 공격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이렇게 유인해서 바다 한가운데 학익진을 펼치고 모든 함포와 총탄을 발사했을 때 일본군은 불과 몇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을 정도로 접근해 있었다고 합니다.
학익진은 원래 육지에서 사용하던 전법인데, 이순신 장군은 바다에서 이 전법을 완성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큰 배를 가지고 진의 형태를 완전하게 이루게 하기 위해 얼마나 바다에서 훈련을 했을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아직도 영화 한산에서 이순신 장군이 외치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선회하라!" "발포하라!"
3. 노량대첩
노량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은 54세의 나이로 전사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모든 백성이 대성통곡을 했던 반면 임금이었던 선조는 노량대첩의 성과를 보고 받고 "알았다"라는 단 한마디를 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을 경계했던 선조다운 대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노량대첩에서 올린 전과는 적선 100척 포획, 200척 파괴, 적군 500명 참수, 180명 생포였습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영화 주인공처럼 전사를 하는데, 그의 죽음에 대해 미스터리 한 부분이 있습니다. 혹자는 일부러 죽기 위해 마지막에 갑옷을 벗고 지휘를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사실 당시 왜군의 조총 탄환으로는 갑주를 뚫지 못하기 때문에 갑옷을 입고 있었다면 사망할 수 없다는 의견이 있었거든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퇴각하는 일본군을 섬멸하는 전투였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도 이 전투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고, 선조와의 불화로 전쟁이 끝나면 본인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했기 때문에 자살 아닌 자살을 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이 돌았던 것입니다.
당시 조선군은 전쟁이 끝나가는 마당에 굳이 왜군과 싸고 싶지 않아 전투를 망설였지만, 이순신은 퇴각하는 왜군에게 마지막 공격을 가합니다. 당시 자국 함선을 보호하기 위해 구원 함대까지 보내 500척이나 되는 대함대였는데, 끝까지 싸웠던 것입니다.
상황을 살펴보면, 저도 살짝 이순신 장군이 스스로 마지막 전투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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