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론을 쓴 존 스튜어트 밀은 160년 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말한 자유라는 개념이 아직도 유효합니다. 자유, 사랑, 평화 등 일반적인 명제에 대해 정의하기는 쉬운 것이 아닌데 이 분은 어떻게 자유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짚어 낼 수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합시다.
1. 개인의 자유를 사회가 제한할 수 있는 조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상당한 자유를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개인마다 처한 환경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무엇인가 하고자 마음먹었을 때 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권리입니다. 원시시대에서 자유는 생존을 위태롭게 했을 것입니다. 멋대로 행동했다가는 야생동물이나 각종 위험에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이죠. 지금은 사회 장치들이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기 때문에 자유라는 개념이 더 의미 있게 사용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지만, 사회는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과 표현을 제한할 수 없는 것일까요? 자유론에서 밀은 분명히 그 조건을 이야기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개인의 자유가 허용된다. 내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불리한 영향을 주면 도덕적 비난이나 법적인 처벌이 가능하다.
심지어 내가 내 돈을 탕진하는 것에 대해서도 자녀가 있는 경우라면, 자녀의 행복을 위해 쓰일 돈을 부모가 마음대로 사용해 버릴 권리는 없다고 제한 될 수 있는 사항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성소수자에 대한 비난이나 마음에 상처를 입힐 수 있는 표현도 제한 대상이라고 합니다.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소수자는 다수자에 비해 대응력이 약할 수밖에 없고, 받은 피해가 다수자 보다 크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표현은 제한되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160년 전에 학자가 자유에 대해 이렇게 명확한 조건을 정의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 조건은 지금도 대부분 받아들여지고 있으니까요.
아시다시피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쉽게 얻은 권리가 아닙니다. 중세시대나 봉건사회만 보더라도 인간은 계급주의로 평등한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양반 제도로 신분에 따라 차별을 하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이 누구나 행동과 표현의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2. 과도한 자유가 문제가 되는 경우
사회제도적으로 자유가 과도하게 허용되어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회 뉴스를 보면 자주 등장하는데, 대표적으로 가정폭력이 있습니다. 남편이라는 이유로 아내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부모라는 이유로 자녀를 학대하거나 자녀의 교육받을 권리를 제한하는 등의 일입니다.
부부간의 불화로 이혼하고서 자녀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문제도 그 일종이고, 어떤 부모는 어린 자녀가 귀찮게 군다고 학대하여 세상을 떠나게 하는 경우도 발생했습니다.
교권이 무너졌다고 하는 이야기가 많은데, 요즘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자유가 도를 넘어 무례한 정도까지 다다르게 되어 사회적인 이슈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요즘 붐이 되고 있는 부업으로 N잡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 회사에서 N잡을 제한하는 것에 대해 자유를 침해한다는 의견도 있고, 미국에서는 벌써 오래된 이슈지만 총기 사용을 제한해야 하는 것도 자유에 대한 이슈들입니다.
자유론을 쓴 밀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행복의 양보다는 질이 중요하다고 하는 질적 공리주의를 주장합니다.
자유론 입장에서 보면, 남편이든, 아내든, 부모든, 자식이든, 선생님이든 학생이든,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자유를 통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바람직스러운 일이죠. 하지만, 그 자유로 누군가의 행복의 질을 떨어뜨린다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강력한 제한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상식적으로 자유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 해를 가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뉴스에서 접하면 정말 강력한 법적 조치를 하여 과도한 자유를 제도적으로 막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어떻게 그 법적인 제한선을 만드느냐는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한데, 반복적인 사례가 모이면 점차 여론이 확보가 되고 자연스럽게 근거가 확보되어 제도화되지 않을까 합니다. 문제는, 독재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결정에 이르기까지 상당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인데,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한 어느 정도 받아 들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3. 다양하고 개성 있는 의견이 필요한 이유
자유론에서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소수의 의견이고, 심지어 틀린 주장까지도 사회적으로는 모두 필요하고 도움이 된다는 입장입니다. 그 이유를 살펴봅시다.
당시에 다수의 의견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영원할 수 없습니다. 그때는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시간이 흘러 틀렸다고 밝혀지는 것들이 비일비재하니까요. 반드시 이것이 영원히 옳다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이죠.
틀린 의견조차 중요합니다. 틀린 의견이 있기 때문에 내 주장이 오히려 확실히 옳다는 근거가 될 수 있으므로 틀렸다고 무시하거나 조롱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또 내 주장이 틀릴 수도 있고요.
사회는 언제나 다수의 의견만으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다수의 의견은 정상이고, 소수의 의견은 비정상으로 치부해 버리면 사회가 건강하게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됩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자유롭게 바뀔 수 있는 기회들이 이러한 다수의 선입관으로 사라져 버릴 수 있습니다.
소수의 튀는 행위나 삶의 방식이 역사적으로 기발하고 대단한 변화의 시발점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가장 의미 있게 생각한 것은 오타쿠(덕후)에 대한 인식 변화입니다.
과거에 오타쿠라고 하면 소수의 어둡고, 본인들만의 세계에 갇힌 폐쇄적인 라이프를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당당하게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 자기만의 분야에서 전문가 못지않은 지식을 갖추고, 그 지식으로 세상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큰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합니다.
오랜 기간 무시당하고,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시간이 흘러 그 의견들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다수의 의견이 정상이고 그 이외의 것들이 비정상이 아니라는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저도 한 분야에 대해 덕후급의 지식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지금의 사회는 보편적인 학벌이나 회사에서 제네럴 리스트의 업무지식은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학력과 무관하게 자신의 기술과 지식이 타인들보다 월등하다면 사회를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는 사회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 역사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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