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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

영화 한산 용의 출현과 실제 한산대첩에 대한 역사적인 비교

by 물결 941213 2022.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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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산 용의 출현을 보고, 실제로 한산대첩 때 저런 스토리와 장면들이 있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상세한 역사적인 고증을 하고, 추가로 재미요소를 넣어 영화를 만들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어느 장면이 실제 역사적인 장면이었고, 영화에 나온 장면이 사실이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1. 영화 한산에 비친 일본 수군의 모습 

 

영화 한산에서 이순신 장군은 박해일 배우가 맡았고, 일본군 장수는 변요한 배우가 담당했습니다. 영화의 줄거리와 맞춰서 궁금했던 점을 찾아보았습니다. 제가 읽은 책은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라는 책인데, 세명의 일본인이 지은 책입니다. 

 

책을 지은 사토 데쓰타로는 일본 전쟁사학자로 해군 중심의 국방전략을 주장했던 사람이고, 세키코세이는 일본 외무성 관리였고, 오가사와라 나가나리는 메이지 시대 일본 해군을 대표하는 문필가였습니다.  

 

영화에 보면, 

 

변요한 배우가 본인을 돕기 위해 합류한 일본 장수들과 술 한잔을 하면서 자화자찬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스토리상 추가했는지 모르겠지만, 조선 기녀들도 함께 있는 장면이죠. 여기서 변요한 배우가 당일 밤 출진해야 한다는 전략을 말하자, 함께 있던 일본 장수들이 칼을 빼고 싸우는 장면이 있습니다. 

 

결국, 변요한 배우는 첩자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지원 나온 장수들을 쳐내고 그들의 군사와 배를 빼앗아 이순신과 대적하게 됩니다. 

 

일본인이 지은 이순신에 대한 책에는 어떻게 나와 있을까요? 

 

당시 일본 원정군은 군기가 무엇인지 모른 채 밤새워 술을 마시고, 서로 속여가며 공명을 다투고, 공을 따지면서 서로 싸우기를 일삼았다고 합니다. 결국 영화 속에 비친 일본군이 서로 다투고 싸웠던 장면은 실제로 전쟁 중에 발생했었던 일들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일본 수준이 왜 이렇게 오합지졸처럼 보였을까요? 

 

그 이유는 일본군은 개인의 역량은 매우 뛰어난 장수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싸움의 신처럼 적을 베어내는 장수들이 많았는데, 이는 전국시대를 경험한 사무라이들의 개인적인 투쟁심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수들을 통합하여 관리하는 장군급의 인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 전쟁을 일으키면서 도요토미헤데요시는 수군에게 7개의 약조를 지키라는 지령만 내렸다고 합니다. 

1. 수군 전체의 의결이 어려울 때는 다수결로 결정하라. 
2. 각 배가 위기를 맞으면 서로 구조한다. 
3. 적의 계략을 탐지하면 서로에게 알린다. 
4. 군공의 경정을 정확히 가려 부정이나 불공정이 없게 하라.
5. 다른 사람의 공로를 훔쳐 자신의 공으로 삼지 않는다. 
6. 각 장수는 반드시 염탐선을 2척씩 낸다. 
7. 본국에 보고할 모든 일은 먼저 감군을 거쳐서 보고한다. 

 

결국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지휘했던 것처럼 전체를 통솔하고 일사불란한 명령체계를 유지하는 군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무라이 중심의 군대는 개인의 역량을 중시하는 군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 수군은 배를 붙여 백병전을 선호했는지도 모릅니다. 

 

실제 영화에서 변요한 배우가 조선군 전함에 접근이 가능한 200보 이내로 근접하자 모든 전함을 각개전투로 돌려 알아서 접근해서 백병전을 벌이라는 명령을 합니다. 그만큼 각자의 전투역량에 의지한 전쟁을 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에 반해, 박해일 배우가 연기한 이순신 장군은 학익진을 완성하기 위해서 혼란한 전쟁 중에서도 진법을 완성하기 위해 장수들을 통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전략과 전술을 이해하는 장수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 아닐까 합니다. 

 

 

 

2. 학익진에 일본군이 말려들게 된 이유 

 

실제로 조선군이 학익진을 펼칠 것이라는 것을 일본군이 알고 있었다면, 영화에서처럼 굳이 유도 전에 휘말려 진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조선의 대포기술이 좋아 원거리에서 타격할 수 있는데, 굳이 일본군이 나를 맞추시오라고 학익진 한가운데로 들어가진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책에서 나온 학익진을 펼쳤단 장면을 보면 영화에서 전개된 전투 장면이 이해가 됩니다. 

 

일본군이 조선군을 추격하여 한가운데 이르자 이순신이 쇠북을 한번 두드리자 조선 수군은 일제히 방향을 바꾸어 좌우 날개를 펼치며 숙연히 해상에 정렬했다. 양군의 함대 거리는 겨우 수십 보에 불과했다. 

 

일본군은 판옥선으로 넘어오기 위해 빠른 속도를 무기로 200보 내로 접근하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했고, 이순신은 근접전에 가까운 거리에서 학익진을 완성하여 한순간에 포격을 가했던 것입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멀리서 뻥뻥 포만 쏘면서 적을 침몰시킨 것이 아니었던 것이죠. 

 

말이 학익진이지 가운데로 적을 모두 유인하기 위한 전략자체가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 위험한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적으로 하여금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도록 그들이 원하는 만큼 접근을 해주었던 것인데, 잘 통제되지 않는 수군이었다면 이러한 작전은 불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학익진
(영화 한산의 학익진)

 

 

3. 이순신 장군이 적의 움직임을 모두 꿰차고 있었던 이유 

 

실제 전장의 이순신 장군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영화에서는 박해일 배우가 연기를 했기 때문에 매우 차분하고, 진중한 모습을 보입니다. 항상 전쟁을 생각하고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한수 앞을 내다보기 위해 애씁니다. 

 

책에서 나온 이순신 장군은 정말 전쟁의 신과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산대첩 이후 이순신 장군은 견내량에 진을 치고 닻을 내리고 야영을 하는데, 달빛이 매우 밝고 파도가 격렬했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갑옷을 입고 북을 베고 자고 있었는데, 홀연히 일어나 앉더니 장수들에게 명령하기를 적군이 간사해 이런 밝은 날 불시에 공격할 수 있으니 대비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합니다. 

 

장수들은 닻을 반쯤 올려두고, 척후선을 미리 돌려 주변 바다를 감시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본군을 발견하여 미리 본진에 통보를 했고, 이순신 장군이 명령하자 모든 배에서 일제히 포를 발사하여 천둥과 같은 소리를 냈다고 합니다. 이에 일본군은 미리 습격에 대비하고 있는 줄 알고 소총을 난사하며 도망쳤다고 합니다. 

 

이는 일본 측에서 기록을 연구하여 이렇게 기술했을 정도면 이순신 장군은 전쟁을 위해 항상 싸움에 임하기 위해 갑옷을 입고 지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척후선을 계속 돌려 적을 탐지하는데 능했던 것 같습니다. 영화에 보면 이순신 장군이 간첩을 활용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이순신 장군과 같은 전략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정탐이 굉장히 중요한 작전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아래는 한산도 진영에서 이순신 장군이 지었다는 시입니다. 

수국에 가을빛이 저무니 
추위에 놀란 기러기 떼 높이 나는구나.
근심으로 뒤척이며 잠 못 이루는 밤
새벽달이 활과 칼을 비추네.

 

이순신 장군은 너무나 멋진 지휘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냥 천재가 아니라 늘 조심하고, 늘 생각하고, 늘 대비를 했기 때문에 전쟁에서 백전백승을 했고, 자신이 가진 전략적 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늘 고민했던 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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