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이 첫째 아들이었던 양녕대군을 폐위 시켜버리고, 셋째 아들이었던 충녕대군(세종대왕)을 선택한 사건은 유명합니다. 속설에 양녕대군이 큰 마음을 먹고 머리 좋은 셋째 동생에게 양보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정말 사실일까요?
1. 아버지 태종 이방원의 성격을 몰랐던 양녕대군
양녕대군은 태종 이방원의 첫째 아들입니다. 장남이었으니 세자가 된 것은 당연하겠죠. 양녕대군도 본인이 다음 임금이 될 것이라는 것을 크게 의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세자가 되었으니 당연하겠죠.
그런데, 본인이 세자이고 다음 임금이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해 너무 자신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아버지 태종에 대해 너무 몰랐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태종 이방원은 조선의 3대 임금으로 임금이 되기 위해 아버지 태조와 싸워 인연을 거의 끊다시피 했고, 이복형제를 죽이고, 친형제와 전쟁을 벌여 피범벅이 된 상태로 임금이 된 인물입니다.
임금이 되어서는 처가 식구들을 모두 죽여버렸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태종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임금이 되었다기보다는 아버지 태조와는 다른 강력하고 힘이 있는 국가, 왕을 중심으로 마음껏 통치할 수 있는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꿈꾸었습니다.
그가 개인의 영달에 뜻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은 바로 다음 임금이었던 세종대왕에게 왕권을 넘겨줄 때를 보면 됩니다. 보통의 임금은 세자에게 왕권을 쉽게 넘기지 않습니다.
임금 수업이라는 명목으로 수년에서 수십 년까지 정치수업을 하고 호호백발이 되어 마지못해 임금의 자리를 넘깁니다. 하지만, 태종은 세종대왕이었던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은 지 딱 2개월 만에 권력을 넘깁니다.
평생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임금 자리를 딱 18년하고 세종대왕에게 자리를 넘긴 것이죠. 이것을 봐도 태종은 권력에 욕심이 있었던 임금은 아니었습니다. 개인보다는 조직, 조직보다는 국가를 생각했죠.
그런데, 양녕대군은 그런 아버지가 무조건 본인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줄 것으로 알고, 온갖 비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심지어, 태종에게는 아들이 4명이나 있었기 때문에 대안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태종 입장에서 양녕대군이 본인 말도 안 듣고, 매번 사고 칠 때마다 거짓말로 변명을 하고, 각종 여인들과 스캔들에 휩싸일 때마다 고민했을 것입니다.
어느 부모든 자식일은 마음대로 안되고, 의도대로 키우기가 쉽지 않다고 하지만, 태종은 온몸에 피를 묻히고 임금이 된 사람인데, 말 안 듣는 아들 때문에 오래 고민할 타입은 아니었던 것이죠.
불쌍한 양녕대군은 본인이 장남이고 세자의 지위를 너무 과신한 탓에 망나니 짓을 멈추지 않아 본인 스스로 굴러들어 온 복을 걷어차 버린 꼴이 된 것입니다.
세간에 양녕대군이 착한 충녕대군(세종)을 위해 일부러 태종 눈밖에 날 짓을 했다는 것은 속설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양녕대군만큼 임금의 권력을 지향했던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망나니 짓을 많이 했습니다.
궁에서 매 키우기, 건달들과 술파티는 약과였고, 봉지련이라는 기생과 놀아나기, 소앵이란 기생과 연애하기, 칠점생이란 기녀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는 매형의 여자였고, 어리라는 여자가 이뻐서 남의 첩인데도 빼앗아 사귀기도 했죠.
2. 정말 충녕대군은 왕권에 뜻이 없었을까?
조선왕조실록이나 관련된 역사책을 보면, 충녕대군은 조용한 성격에 특히 학문에 뛰어나고, 잡학 다식하여 악기도 다루고, 그림도 그리고, 화초도 키우는 등 마치 밖에서 보면 왕권에 관심이 없는 듯 보입니다.
정말로 왕권에 뜻이 없으니, 원하는 취미생활과 공부나 열심히 하자는 식으로 생활을 했던 것일까요?
하지만, 우리가 읽는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태종실록은 세종대왕 때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충녕대군에 대해 우호적으로 써지지 않았을까 상상을 해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이었던 충녕대군이 왕권에 의지를 보인 것이 아닌가 하는 내용들이 몇 개 있어서 소개를 드립니다. 아무리 그래도 왕의 아들로 태어나 임금 자리 한번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있겠습니까?
충녕대군이 학문에 워낙 뛰어나서 신하들도 모두 학문에 대해서는 인정을 했는데 그중에서 정치의 기본이 되었던 유학 부문에 가장 많은 성취를 이루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양녕대군이 말썽을 피울 때마다 준비된 세자로 충녕대군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공개된 석상에서 태종에게 본인의 유학 실력을 드러낸 적도 있고, 양녕대군이 비행을 저지를 때마다 직접적인 충고를 했던 적도 있습니다.
이미 다방면으로 재능을 보여주어 신하들의 신뢰를 얻은 충녕대군은 양녕대군이 사고를 칠 때마다 점수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양녕대군이 쫓겨나고, 본인이 세자가 된 후 불과 2개월 만에 태종이 임금 자리를 물려주었을 때 너무나 훌륭하게 임금 역할을 해 낸 것을 보면, 충녕대군은 임금으로서 갖춰야 할 정치적 소양을 일찍부터 준비해 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3. 하마터면, 세종대왕이 사라졌을 뻔!
여기서 충녕대군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세종대왕입니다.
세종대왕은 가끔 우스갯소리로 외계인이었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훌륭한 업적을 너무 많이 냈고, 국가경영을 깔끔하게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양녕대군이 스스로 사고를 치지 않고 착실히 임금 수업을 받았다면, 세종대왕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요?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지만, 양녕대군이 임금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정말 아찔합니다.
양녕대군이 얼마나 훌륭한 임금이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과거 전력을 생각하면 여자들 품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다가 흥청망청 권력의 맛에 시간만 보내다가 별다른 업적 없이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대군이었던 세종대왕은 빛을 못 보고 뒷방에서 화초나 수석을 모으는 등 취미생활만 하다가 여생을 마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영향이 없었을까요?
심각한 영향이 있죠. 아마 세종대왕이 그때 임금이 되지 못했다면, 우리는 지금 중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최소한 한글이 아니라 한자로 글씨를 쓰고 있었겠죠. 끔찍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세종대왕도 훌륭하지만 저는 태종이 정말 뛰어난 군주였다고 생각합니다.
장남을 우선시하는 유교 중심 국가에서 이미 세자로 책봉했음에서 유력 후보를 날려 보내고, 충녕대군을 임금으로 삼았으니 탁월한 판단력에 존경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가 처가 식구들을 모두 죽였던 이유가 다음 임금이 외척세력에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사전에 싹을 잘라 놓은 것인데, 덕분에 세종대왕이 마음껏 본인의 뜻을 펼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저런 사건을 생각해 보면, 태종 이방원과 세종대왕 두 분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양한 인생이 숨어있습니다. 철종도 슬픈 인생을 살았고, 홍국영도 파란만장했습니다. 역사 속에서 다른 분들의 인생을 살펴보면서 배울 점을 찾아보는 것도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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