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읽은 철학 에세이 서너 권에서 연속으로 '티벳 사자의 서'에 대한 언급과 관련된 내용을 소개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티벳 사자의 서'를 직접 읽은 것은 아니지만 삶과 죽음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개념이 인상 깊어 공유를 드릴까 합니다.
1. '티벳 사자의 서'가 놀라운 점
이 책은 죽은 사람에게 해탈에 이르는 방법과 유시 태어나는 윤회를 할 때 좀 더 좋은 조건으로 환생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놀랍다고 생각한 것은 이 책은 기원전 8세기 정도에 티벳의 최고 성인이라고 불리는 파드마삼바바라는 분이 쓴 것인데, 그렇게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이 '죽음'에 대해 이렇게 깊은 고민을 했었고, '윤회'라는 개념에 대해 실제로 경험한 것 처럼 단계별로 구체적인 설명을 할 수 있었는지였습니다.
마치, 몇 번은 죽었다가 다시 환생을 해 본 사람이 직접 설명하듯이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글을 썼다는 점이 신기했습니다. 실제로 티벳의 최고 승려인 달라이라마는 과거의 전생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달라이라마는 죽기 전에 자신이 어느 지방에서 다시 환생할 것을 제자들에게 유언으로 남기고, 제자들은 이후 그 지역에 가서 선대 달라이라마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를 다시 달라이라마로 모시는 전통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이 맞다면, 달라이라마는 죽었다 환생하는 일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는 뜻이고, 티벳 사자의 서를 쓴 파드마삼바바라는 고승도 이런 경험을 한 분이 아닐까 추측을 해 봅니다.
또, 이 책은 파드마삼바바가 남긴 108개의 경전 중 하나일 뿐이고, 심지어 이 경전들은 인류가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었다는 이유로 모두 숨겼는데, 그중에 티벳 사자의 서는 미래에 발견될 시기를 예언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600년 후에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 600년 후인 1350년에 티벳 북부지방 동굴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가끔 유튜브에 조선시대 모습이라고 하면서 1900년대 사진을 보여주곤 합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허허벌판에 다들 삼베옷과 하얀 목면 옷을 입고 근근이 농사로 연명하면서 살아가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350년에 티벳 사자의 서가 발견되었고, 실제로 쓰인 시기는 이 보다 600년 전이라는 이야기인데, 그 당시 티벳의 승려가 정말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은 명상을 하면서 철학적인 경전을 남길 수 있는 생활을 했었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습니다.
수백 년 전에 살았던 분들을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고 그 정도 시기였다면 문명사회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야생의 시기로 느껴지는데 생존하기도 힘든 시대에 이렇게 고차원적인 철학을 했다는 것에 신비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미 그 시절부터, 업보(카르마), 윤회(환생), 해탈(자유)에 대한 개념이 이렇게 철학적으로 정착되어 있었다니, 생활하는 것조차 힘들었을 것 같은 과거에서 인류가 이런 고민을 해 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티벳 사자의 서'에 나오는 삶과 죽음의 관계
티벳 사자의 서는 원래 바드마삼바바가 쓴 책 제목이 아닙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바르도 퇴돌'인데 바르도는 둘 사이란 뜻이고 퇴돌은 듣는 것을 통해 벗어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해석을 조금 곁들여 풀이하자면, 삶과 삶의 사이(죽은 후 환생 전까지 49일간)에서 한번 듣는 것 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게 하는 책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파드마삼바바는 인도에서 온 고승이므로 해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죽은 사람이 영원한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는 삶과 죽음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것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죽어도 자아(의식)는 남아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고, 환생(윤회) 전까지 나의 상태를 인지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략적인 환생의 프로세스는,
인간이 죽으면 윤회의 고리에 의해 49일간 중간단계를 거치게 되어 있고, 어떻게 지나가는지에 따라서 해탈을 하여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도 있고, 환생을 하여 다시 고통스러운 삶을 반복할 수도 있는데, 환생은 반드시 인간으로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업에 따라서 동물이나 곤충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의식이 살아있는 가운데 삶과 죽음은 윤회의 고리에 의해 영원히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삶의 고통이고, 그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을 하면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개념입니다.
제가 일고 있는 불교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릅니다. 티벳의 불교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래 우리나라의 불교는 대승불교이고, 티벳의 불교는 태초의 불교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티벳 사자의 서가 말해주는 점은 삶과 죽음은 모두 내 마음속에 있는 것으로 현실에서 비치는 모든 현상이 결국은 마음에서 나온 허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제가 알고 있는 불교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오래된 고대시대부터 이런 개념이 있었다니 어떻게 인류가 이런 생각을 해 냈는지 신비합니다. 저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신만만하지만, 강아지나 고양이와 같은 동물일 뿐이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3. '티벳 사자의 서'를 보고 알게 된 점
티벳 사자의 서는 반드시 불교적인 시각에서 쓴 책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로 특정 종교의 옳고 그름을 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책에서는 사후에 자신의 문화권에서 본 종교적인 상징과 인물을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불교인이라면 부처와 염라대왕을 보게 되고, 기독교인이라면 천사와 악마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후에 만나는 모든 존재들과 빛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후 우리는 염라대왕을 만나는데 이를 죽음의 왕, 야마라고 부릅니다. 야마는 우리의 선행과 악행을 가려내는데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의 투영물이라는 것입니다. 심판자는 사실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책에서는 야마와 모든 신들은 우리가 만든 환영이라고 정의하고, 우리의 의식체는 살아있을 때 성향으로 만들어진 몸이며 본래는 텅 비어 있기 때문에 텅 빈 것에 상처를 입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마음이 모든 것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윤회를 하지 않고, 죽지도 않는 영생의 존재라 할지라도 인생이 허망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허망한지 허망하지 않은지는 결국 내 마음이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죽음 이후의 세계도 결국 내 마음의 내면세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인생의 허무함은 모두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행동을 하면서 인생에 미련과 아쉬움 후회를 만들지 말라고 말합니다.
내가 살아온 것에 심판을 할 존재는 없습니다. 삶과 죽음이 결국은 바로 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우리는 세상을 잠시 왔다가 돌아가는 여행자라고 말하는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이 마치 제3자의 인생처럼 객관적으로 비칩니다.
생활이 괴롭고 힘들 때, 조금은 내 마음을 편하게 바라볼 수 있고 나를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회사에서 일 때문에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집에서 와이프와 다투었을 때 세상이 온통 엉망으로 보일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마음을 좀 더 빠르게 가다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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