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사춘기를 겪었는데, 당시 제일 고민스러웠던 것이 나만의 가치관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내 눈앞에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는데 나는 어떤 기준으로 맞고 틀리다를 결정할 수 있을까? 부모님이 원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하면서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1. 선과 악의 기준
중학생일 때 제가 생각했던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은 상대방과 입장 바꿔 생각해 보기였습니다.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기 전에 내가 아니라 상대방 혹은 그 누군가였다면 동일하게 판단했을까를 상상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때 저는 위인전을 많이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내 성격과 비슷한 위인을 찾아서 그 사람이 살면서 내렸던 판단기준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자동차왕 헨리포드와 강철왕 카네기를 제일 존경했었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때는 그렇고, 지금 50대가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 생각해 보면 여전히 선과 악의 기준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에픽테토스라는 스토어 학파 철학자에 의하면,
우리를 모욕하는 것은, 욕을 퍼붓고 때리는 그 당사자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모욕하고 있다는 내 믿음이 모욕감을 유발한다고 말했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분노를 유발하고 있을 때 실제로는 내 머릿속에 분노의 연료가 차오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가라앉힐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 스토아 철학자들은 절대적인 선이나 절대적인 악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정의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돌에 걸려 넘어져 크게 다쳤다고 가정해 볼 때, 그 돌이 선인가 악인가 생각해 보면 그 돌은 선도 악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넘어져서 화가 치밀어 오르면 악이 되는 것이고, 내 실수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그냥 돌로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반응이 필요한데, 그것이 '나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범위와 문맥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나의 해석입니다. 내가 이러저러한 근거를 붙여 '나쁘다'라고 정의하면 나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감정을 통제할 수만 있다면, 사건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곧장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감정을 먼저 드러낸다는 것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져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2. 실제로 그렇게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사물이나 사건 자체에 선악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는 불교 철학에서도 자주 읽었던 내용입니다. 결국 내 마음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선과 악이 결정된다는 것이고, 우리가 고민하고 갈등에 빠지는 이유는 선과 악의 관계가 없는 사건에 대해 우리가 자의적인 해석을 하기 때문에 문제라는 논리입니다.
요즘 뉴스를 살펴보면 끔찍한 사건이 많습니다.
아침 등교할 때 쓰레기차에 치여 죽은 여대생 사건도 있고, 유턴하던 음주 차량이 인도를 덮쳐 초등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고, 미국에서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는 사건도 자주 뉴스에서 보았습니다.
내가 만약 그 사건의 당사자인 부모나 형제, 가족이라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말 그 사건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인데, 내가 스스로 나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인지, 이런 일을 정말 중립적으로 생각하고 좋은 방향으로 받아들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해 보았습니다.
저도 딸을 키우고 있지만, 늘 아이가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을지 두렵고 겁이 납니다. 건강하고 안전하게 성장할 수만 있다면 그것 자체가 행복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공부와 성적은 아이의 건강과 안전에 비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정말 그 사고를 일으킨 상대방에 대하여 분노나 원한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분명히 지금의 저라면 땅을 치고 자책을 하면서 사고를 일으킨 사람을 처벌해야 한다고 소리쳤을 것입니다.
모든 일에 중립적인 판단기준을 갖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세상의 인연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거나 완전히 끊어야 할 듯합니다. 서로의 관계에 묶여 있다면 어떻게 되든 편파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아무리 가족이라도 정을 어느 정도는 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밀접하고 단단한 관계가 바로 가족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배우자와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를 놓고 생각할 때 나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가족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가족이 잘못되었을 때 나는 가족의 사고와 더불어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불교를 수행하는 스님이나 자기만의 가치관이 뚜렷한 철학자들은 대부분 독신이기 때문에 그런 세속적인 인연과 무관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가족을 이루고 산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굉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 벗어나기 힘든 관계를 지고 살아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3.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저는 선악을 판단하는 것에 있어서 가족관계를 벗어나기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가족관계가 별로 좋지 않아 이혼을 한다거나 자녀와 연락을 오랫동안 끊고 산다면 다르겠지만, 보통의 가정을 생각하면 가족이 관련된 사건에서 중립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정을 떼어가는 과정은 어떻게 보면 나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과정과 관련이 깊습니다. 저는 한때 심각한 고민에 빠진 적이 있는데, 스스로 행복해할 줄 모른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제 행복은 제 딸이 웃고 기뻐하거나, 제 와이프가 좋아하면 저도 행복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가족들이 행복해하면 저도 기쁘고 즐거웠기 때문에 정말 그것이 나의 행복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제 행복이 가족에게 종속되어 있다면, 저는 사실 스스로 행복을 찾지 못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고민이 되었고, 이런 느낌이 제가 가정을 이끌어야 하는 가장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도 했습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저는 제 행복을 저 스스로 만들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관계에서 찾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족들과의 관계를 조금이나마 객관적으로 만드는 방법이 저에게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무심한 가장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 딸을 사랑하되 딸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극단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딸에게 나쁜 일이 생겨도 나는 다른 측면으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딸에게 어떤 나쁜 사건이 닥치면 당연히 저는 정신 못 차리고 헤메일 것이 분명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을 정리되면 기존 이런 생각을 평소에 해보지 않았을 때 보다 조금은 빨리 정신을 차리게 되지 않을까 기대를 합니다.
결국,
선악의 기준이 내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말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가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물론 가족관계에서 느껴지는 행복보다 큰 것을 찾기는 쉽지 않겠지만, 노력해야 합니다.
나를 제외한 타인(가족 포함)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워질수록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중립적으로 가져가기 쉬운 것 같습니다. 선과 악도 그렇고, 행복과 불행도 결국은 내가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알고는 있는데 실제로 제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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